강진군 주최 제3회 강진역사문화학술심포지엄 열어

이순신장군의 일기인‘난중일기’를 중심으로 평가되고 있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역사를 다시 해석해서 적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난중일기속에는 개인적 감정과 당파적 입장이 개입돼 실제 전투에서 활동했던 호남출신 장수들이나 주변지역 주민들의 활약상이 폄하돼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2일 강진군에 따르면 광주교대 김덕진 교수는 강진군 주최로 지난 29일 강진아트홀에서 열린 제3회 강진역사문화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전라우수사 김억추와 명량해전 : 기록과 전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란 논문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역사는 이순신장군이 적은 ‘난중일기’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인데 일기는 자기 중심성이 강해 자기 약점을 숨기고 장점을 내세운다거나 친한 인물을 추겨 세우고 싫은 인물을 깍아 내리는 특성이 많다”며 “개인의 일기인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역할만 대단히 높게 평가되고 주변 장수들과 현지 주민들의 역할이 폄하되고 있는 것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일”이라고 지적했다.

김교수는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속에서 호남출신이자 강진이 고향인 전라우수사 김억추 장군에 대해 장수감이 되지 못한다나 명량해전에서는 꽁무니를 빼고 뒤에서 얼쩡거리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나 이는 지극히 자기 중심성이 강한 일기속의 표현일 뿐”이라며 “난중일기속에는 김억추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운 장흥 출신의 김위, 광주 출신의 강희창, 해남 출신의 박팽세, 차은로(나주 출신)와 강옥상(무안 출신), 정응(함평 출신) 등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김교수는 또 “김억추장군의 형제중에 김응추는 이순신 막하에서 활약하다 명량해전에서 순절하였고 김대복과 덕복 형제는 명량해전 때에 김억추의 좌우에서 활약하다 순절하였으나 이순신 장군은 이또한 난중일기에서 전혀 언급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 이유에 대해 김교수는 “난중일기가 개인의 감정을 표출하는 일기라는 특수성과 함께 임란(1592년) 직전에 터진 동서분당(1575년)과 기축옥사(1589년) 및 건저의(1591) 등을 거치는 과정에서 형성된 극심한 당파싸움이 왜란의 객관적인 기록과 전란중에 활동한 사람들의 공정한 평가를 가로막았다”고 주장했다.

김교수는 “이순신은 동인계 사람들의 추천을 받았으나 김억추는 서인계 사람들과 가까웠으며 김억추를 선조에게 전라우수사로 추천한 김응남은 한때 이순신과 적대관계에 있던 사람”이라며 “이 관계속에서 이순신은 서인계의 추천을 받은 김억추와 그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일기속에서 혹평했으며 이런 내용이 오늘날 마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모든 것인 것처럼 통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교수는 “난중일기 곳곳에는 특정 개인을 평가하면서 ‘형편없는 짓’, ‘흉계가 우습다’, ‘참으로 음흉하다’ 등의 표현이 많은데 사실 여부를 떠나 국란에 처한 위기상황에서 전장에서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다른 장수들에 대해 이순신이 ‘극단적’이고 ‘분파적’인 입장을 가진게 분명한 사실이다”며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당색이 사실을 기록하는 데에 적지 않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고 새로운 기록의 발굴과 기존 기록의 재해석이 요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날 제3회 강진역사문화학술심포지엄에서는 전북대 하태규 교수가 ‘정유재란과 호남, 그리고 강진’ 권수용 조선대 책임연구원이‘강진출신 왜란유공자 선양활동’ 김만호 전남대강사가 ‘금릉창의록의 발간과 그 의의를 발표했다.

한편 강진군은 올해로 3회째 강진역사문화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으며 제1회때 ‘강재 박기현 후손가의 소장문서를 통해 본 조선말기 강진 지역사회’란 주제를 다뤘으며, 2회때인 지난해에는‘강진지역의 근대화와 그 반향’ 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강진원군수는 “임진왜란 승리의 원동력은 염걸 장군의 허수아비 전술을 비롯한 우리 강진 사람들의 지혜와 애국심이었음에 우리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도 충분하리라 생각한다”며 “강진군은 오늘 학술심포지엄의 성과를 기반으로 하여, 강진의 역사가 체계적으로 연구되고 정리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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