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총격행위 인정, 특정 사망자 유족에게 최초 사과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 유족에게 사죄의 절을 하고 있는 전 공수부대요원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재공)
▲ 유족에게 사죄의 절을 하고 있는 전 공수부대요원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재공)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송선태, 이하‘조사위’)는 3월 16일(화, 15:00), 국립5·18민주묘지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민간인을 사망케한 계엄군과 유가족 간 화해의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는 당시 작전에 참여한 계엄군이 자신의 행위를 고백하고 유족에게 사과하겠다는 의사를 조사위에 전달하였고, 유족도 가해자의 사과를 수용함으로써 마련되었다.

조사위에 따르면, 조사위는 그간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계엄군들이 자신들이 목격한 사건들을 증언한 경우는 많이 있었으나, 가해자가 자신이 직접 발포하여 특정인을 숨지게 했다며 유족에게 사과 의사를 밝힌 경우는 최초라고 밝혔다.

이날 국립5·18민주묘지 민주의 문 접견실에 마련된 만남의 자리에서 가해자 A 씨는 희생자 故 박병현 씨의 두 형제 등 유가족을 만나 “어떤 말로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드려 죄송하다”고 말문을 연 뒤 “저의 사과가 또 다른 아픔을 줄 것 같아 망설였다”며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다. 유가족에게 큰절을 올리며 A 씨는 “지난 40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며 “유가족을 이제라도 만나 용서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울먹였다.

이같은 사과에 대해 故 박병현 씨 형인 박종수(73세) 씨는 “늦게라도 사과해주어 고맙다”며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박 씨는 “용기있게 나서주어 참으로 다행이고 고맙다”며 “과거의 아픔을 다 잊어버리고 떳떳하게 마음편히 살아달라”며 A 씨를 안아주었다.

故 박병현(당시 25세)씨는 1980년 5월 23일 농사일을 도우러 고향인 보성으로 가기 위해 광주시 남구 노대동 소재 ‘노대남제’ 저수지 부근을 지나가다가 당시 이 지역을 순찰 중이던 7공수여단 33대대 8지역대 소속의 A 씨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조사위는 밝혔다.

A 씨는 총격 당시의 상황에 대해 “1개 중대 병력이 광주시 외곽 차단의 목적으로 정찰 등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다 하며, “소로길을 이용하여 화순 방향으로 걸어가던 민간인 젊은 남자 2명이 저희들(공수부대원)을 보고 도망”을 하기에 “도망가면 쏜다”며 정지할 것을 명령했으나, 겁에 질려 도주하던 상황에서“무의식적으로 사격을 했다”고 진술했다.

또한, A 씨는 박병현 씨의 사망 현장 주변에는 “총기나 위협이 될 만한 물건이 전혀 없었다”며, “대원들에게 저항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한 사실도 없다”면서 단순히 “겁을 먹고 도망가던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그간 조사위는 조사활동을 통해 A 씨의 고백과 유사한 사례를 다수 확인하였다. 향후 계엄군과 희생자(유가족) 간 상호 의사가 있는 경우에는 조사위가 이를 적극 주선하여 조사위 설치 목적대로 사과와 용서를 통한 불행한 과거사 치유 및 국민통합에 기여할 예정이다.

이 사건은 지난 2001년 ‘대통령직속 의문사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도 다루어진 바 있는데, 이번 조사위에서 당시 조사 자료를 넘겨받아 추가로 조사하던 중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5·18민주화운동 유족회 김영훈 회장은 “유족들을 대표해서 이제라도 용기있게 고백을 해줘서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조사위 송선태 위원장은 “이제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건강관리에도 힘써주길 바라고, 당시 작전에 동원된 계엄군들이 당당히 증언해주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가해자 A 씨, 희생자 故 박병현 씨의 두 형제, 5·18민주화운동 유족회 김영훈 회장, 그리고 조사위 송선태 위원장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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