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훈장 31명, 건국포장 3명, 대통령표창 9명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오는 11월 17일(월) 제75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악형으로 순국한 이유홍 선생 등 43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

13일 국가보훈처 발표에 따르면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1명(애국장 10, 애족장 21), 건국포장 3명, 대통령표창 9명이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5회 순국선열의 날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국가보훈처는 일제의 각종 행형기록 및 정보문서, 신문보도 기사의 분석․검토, 적극적인 현지조사를 통해 41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 포상하게 되었다. 특히 이번 포상자 중 6명은 판결문 등 입증자료를 통해 공적내용을 발굴, 확인한 후 다시 읍․면․동사무소에서 제적등본, 가족관계등록부 등을 거꾸로 추적하여 유족을 찾아 포상함으로써 후손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0,114명, 건국포장 1,068명, 대통령표창 2,562명 등 총 13,744명에 이른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과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과 사료 수집 협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국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발굴함으로써 숨겨진 독립유공자를 찾는데 더욱 노력해나갈 계획이다.

▸ 일제 강점 직전 함남․강원 일대에서 의병항전을 이끈 강두필 선생 / 1909년 7월부터 1910년 7월까지 강원도와 함경남도 일대에서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에 항전한 강두필(姜斗弼)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00여 명의 의병을 규합, 강원도 평강․회양․금성 및 함남 안변 등지를 종횡무진 누비며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으며, 헌병분견소를 공격하여 일제를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조선침략 만행을 규탄하는 격문을 보내는 등 일제의 죄상을 알리는 데도 적극 나섰다.

선생이 이끄는 의진은 일본군에게 ‘안변군 고련동’에서의 전투를 제안하고, 응하지 않을 경우 전멸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하는 등 대담한 활동으로 적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국가보훈처가 「폭도에 관한 편책」등에서 활동사실을 발굴하여 이루어졌으며,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던 강원․함경 지역 의병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 독립만세 외치다 일제의 악형으로 순국한 이유홍 선생 / 1919년 4월 충남 홍성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이유홍(李有弘)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만세운동 참여 당시 46세의 서당교사였던 선생은 4월 7일 밤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 소재 월산(月山) 위에 올라가 주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어 태 90대를 받고 순국하였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국가보훈처가 판결문에서 활동내용을 파악하고 「수형인명표폐기목록장」에서 수형내용을 확인하였으며, 제적부에서 사망 시점을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선생의 포상은 홍성지역 3․1운동의 격렬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악형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 치른 이병탁 선생 / 서북지역을 무대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이병탁(李炳鐸)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평안남도 순천 출신으로 1920년 음력 11월 고향인 순천군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고, 같은 해 12월 평안남도 성천․개천․순천과 평안북도 영변군 등지를 무대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1921.8.8)는 선생 등의 활동에 대해 “중국 관전현에 있는 대한독립광복군 총사령관 조맹선 일파와 연락을 맺고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해 상해임시정부에 보내 무기를 구입하고 후일 독립군이 조선에 들어올 때 내외가 상응하여 조선독립을 달성하기를 기도”했다고 보도했다.

선생의 활동은 3․1운동 직후 국내의 독립운동이 임시정부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 등 국외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특히 국가보훈처가 선생의 공적내용을 발굴, 확인하고 유족을 찾아 포상함으로써 후손의 자긍심을 높이게 되었다.

▸ 미주대륙에 한국독립의 씨앗을 뿌린 이민 1세대, 방화중 선생 / 1905년부터 근 30년간 미국에서 한인단체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면서 초기 미주지역 한국독립운동 발전에 초석을 놓은 방화중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황해도 안악 출신으로 평남 평양에 거주하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 1세대로, 1905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신보 편집인, 상항친목회 회계 겸 학무, 로스앤젤레스에서 공립협회 나성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하여 미주지역 초기 한인단체운동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

1909년부터 미주지역 한인사회를 통합하는데 앞장서 국민회 북미총회 대의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서기대리, 동 나성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맞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한국독립 쟁취를 위해 이승만 등과 파리평화회의 대표파견 문제를 협의하고 1928년에는 『삼일신보』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미주지역 동포의 단결과 조국독립에 대한 선생의 열정은 『신한민보』(1917.6.21)에 기고한 글(「우리 한인도 때를 따라 활동할 일」)에 잘 드러난다. “우리의 제일 원하는 것은 우리의 일은 독립을 회복코자 함이라. 고로 우리가 이미 국민회를 조직하고 동서에 헤어진 동포의 마음을 한 곳에 모아 큰 목적을 세웠으니 우리는 조만간 우리의 소원을 성취할지라(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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