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태교수, 학술지 기고 논문 통해 주장

‘5·18항쟁’의 공식 명칭에 ‘광주’라는 지명은 반드시 들어가야 하며, 이를 포함해 항쟁의 명칭에 대한 심도 있는 학술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3일 전남대에 따르면 전남대학교 5·18연구소장을 역임한 최영태(사학과) 교수는 최근 발행된 ‘민주주의와 인권’ 15권 3호(2015년 12월, 전남대 5·18연구소 刊)에 기고한 논문에서 “5·18을 ‘5·18광주민주화운동’ 또는 ‘5·18광주항쟁’으로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최영태 교수는 ‘5·18항쟁의 명칭문제: ’광주‘와 ’민중‘이라는 용어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전국화라는 명분 때문에 5·18의 공식 명칭을 광주가 빠진 ‘5·18민주화운동’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 과정에 정치적 고려가 너무 크게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역사적 사건의 명칭을 정할 때는 일반적 경향성이 있다.”면서 “역사적 사건의 지역적 범위가 한정되었거나, 특정 지역의 역할이 두드러진 사건의 경우 일반적으로 사건 명칭에 지역명이 들어간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그 대표적 사례로 ‘광주학생항일운동’ ‘제주4·3항쟁’ ‘부마항쟁’ 등을 들었다.

최 교수는 특히, “5·18은 20세기 후반 지구상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민주화운동이자 아시아 등 다른 국가의 민주화운동에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는 측면에서 전국화 못지않게 ‘세계화’의 대상.”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따라서 역사적 사건 명칭의 일반적 경향성과 세계사적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5·18 명칭에 ‘광주’라는 지역명이 들어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강조했다.

 “‘6.4천안문사건’이 그냥 ‘6.4사건’이라고 불렸을 때, ‘파리콤뮌’이 ‘3·18콤뮌’이라고 불렸을 때 우리 국민들이 이 사건들을 얼마나 기억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세계화 차원에서 5·18의 명칭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최 교수의 주장이다.

최 교수는 이어 “이번 기회에 5·18의 명칭에서 ‘광주’라는 지명을 제외시킨 결정의 적절성 여부, ‘민중항쟁’이라는 성격규정을 명칭에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에 대해 학술적 차원의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한편, 5·18은 1980년 항쟁 당시에는 ‘폭동’, 항쟁 이후 ‘광주사태’ ‘5·18광주민주화운동’ ‘5·18광주민중항쟁’ 등으로 불리다가 1990년대 중반부터 5·18의 전국화라는 명분 아래 ‘광주’를 뺀 ‘5·18민주화운동’으로 공식화해 불리고 있다.

최영태 교수는 1991년 전남대학교 전임교원으로 임용된 뒤 인문대학장, 교무처장 을 역임했으며 5·18연구소장, 흥사단/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 등을 통해 민주·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5·18항쟁의 명칭에 대한 문제 제기

전남대 5·18연구소장을 역임한 전남대 최영태 교수(역사학 전공)는 2015년 12월 말에 발행된 『민주주의와 인권』 15권 3호에서 「5·18항쟁의 명칭문제: ‘광주’와 ‘민중’이라는 용어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통해 5·18항쟁의 명칭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심도있는 학술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논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논문의 내용 요약 / 5・18에 대해서는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정부가 사용하는 용어로는 항쟁 당시에는 ‘폭동’, 항쟁 후에는 ‘광주사태’, 그리고 노태우 정부 출범 후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려졌다. 정부에서 사용하는 공식 명칭의 변화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의 진전 정도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민주・진보진영의 경우에도 항쟁 초기에는 ‘광주사태’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했다. 이 명칭은 계엄군에 의해 자행된 야만적 행위와 이로 인한 광주시민들의 큰 희생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정부 및 보수진영에서 사용된 ‘광주사태’의 개념과는 전혀 달랐다. ‘광주의거’라는 용어는 1980년대 중반부터 많이 사용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대 후반부터 민주・진보진영에서 가장 선호하는 명칭이 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부터 민주・진보진영에서 5・18의 전국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5・18의 명칭에서 ‘광주’라는 지역명을 빼자는 주장을 했다. 이런 주장은 현실화되어 5・18의 명칭이 ‘5・18민중항쟁’ 혹은 ‘5・18항쟁’으로 바뀌어졌다. 이런 경향은 정부의 명칭 사용에도 영향을 주어 현재 5・18에 대한 정부의 공식 명칭은 ‘5・18민주화운동’이다. 국회에서 제정된 각종 법률에서도 ‘5・18민주화운동’으로 표기되었다.

역사적 사건의 명칭을 정할 때는 일반적 경향성이라는 게 있다. 역사적 사건의 지역적 범위가 한정되었거나 특정 지역의 역할이 두드러진 사건의 경우 일반적으로 사건 명칭에 지역명이 들어간다. 광주학생항일운동, 제주4・3항쟁, 부마항쟁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5・18의 명칭이 바뀐 주요 동기였던 5・18의 전국화라는 취지와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명칭이 바뀌기까지의 논의절차와 이유 등에 아쉬움이 크다. 명칭 변경 과정에 정치적 고려가 너무 크게 작용했다.

5・18은 20세기 후반 지구상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민주화운동이다. 5・18은 이 운동이 지향하는 정신과 이념이 세계사적 보편성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적인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가 말한 ‘에로스 효과’처럼 5・18은 아시아의 민주화세력들에게 많은 용기와 영감, 그리고 자국에서의 민주화운동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만들어주었다.

5·18의 세계성은 5·18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당연히 5・18은 전국화 못지 않게 세계화의 대상이다. 명칭은 이런 양면성을 함께 고려하며 정해야 한다.

‘6.4천안문사건’이 그냥 ‘6.4사건’이라고 불렸을 때, ‘파리콤뮌’이 ‘3·18콤뮌’이라고 불렸을 때 한국인들이 이 사건들을 얼마나 기억할 수 있는지를 상상해보라. 역사적 사건의 명칭을 붙일 때의 일반적 경향 및 세계사적 측면을 고려한다면 5・18의 명칭에 ‘광주’라는 지역명이 들어가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시민사회 및 정치권의 결정과는 별개로 학계에서 세심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5・18의 명칭을 정하는 데는 5・18의 성격 논의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5・18을 ‘민중혁명’으로 보는 견해는 5・18 이후 급격하게 변동된 이데올로기의 지형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5・18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 및 1980년 봄 전국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계승적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다.

5・18항쟁에서 노동자·농민·빈민·소상공인 등 기층민중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항쟁의 횃불을 처음 든 대학생들, 항쟁 순간순간 함께 한 수십만 시민들의 존재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항쟁의 이런 복함적 이유들 때문에 5·18의 성격과 관련해서는 ‘시민항쟁’론과 ‘민중항쟁’론이 병존하였다.

이처럼 5・18의 성격이 복합적이고 또 5・18의 성격 논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5・18의 명칭에 성격논쟁의 어느 한쪽 내용을 곧바로 반영시키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통상적으로 사건의 성격이 명칭에 반영되는 수준은 대개는 혁명, 항쟁, 사건, 운동 등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국내사건으로 부마항쟁, 6월항쟁, 제주4·3항쟁, 그리고 외국의 사례로 5・18과 비교의 대상이 되는 파리코뮌이나, 성격논쟁이 진행 중인 천안문사건, 부르주아 혁명인지 여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던 프랑스 2월혁명의 명칭이 성격논쟁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5・18을 ‘5·18광주민주화운동’, 혹은 ‘5・18광주항쟁’으로 부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5・18처럼 다양한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이름 붙여질 수 있는 현상을 단 하나의 용어만으로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역사 이해와 역사 명명(命名)은 사회적 합의의 창출 능력에 따라 좌우되므로 한 사회의 집단적 이성과 민주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글의 일차적 목적은 5・18의 명칭에서 ‘광주’라는 지명을 제외시킨 결정의 적절성 여부, 그리고 ‘민중항쟁’이라는 성격규정을 명칭에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에 대해 학술적 차원에서 심도있는 논의를 해보자는 제안적 의미를 담고 있다.

또 하나 5・18항쟁에는 5월 18일 외에도 5월 21일과 5월 27일 등 특별한 의미를 지닌 날들이 많다. 향후 5・18의 명칭을 논의할 때는 5・18이라는 용어가 이런 특별한 날자와 사건들의 의미까지 모두 포괄할 수 있는지도 살필 필요가 있다. ‘5・18항쟁’ 외에 ‘5월항쟁’이라는 명칭도 함께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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