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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유네스코등재 기념재단 이사장, “아 광주여, 우리들의 영원한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장로님!
조경륜 기자  |  fci2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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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7.14  17:2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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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존경하는 조아라 장로님께서 소천하신 지 18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한없이 존경했고 사랑하는 장로님께서는 한평생을 이 땅에 민주화와 정의, 평화를 이루어 가는 삶을 살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아 사회 교육 선교에 공헌하신바 클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에 온몸을 바쳐 헌신해오셨습니다.

   
김영진 유네스코등재 기념재단 이사장  (자료사진)

특히 5·18을 전후한 서슬 퍼런 시기에 불의한 계엄 신군부에 맞서 정의를 외치시다가 옥고를 치르신 후 5·18 관련 구속자, 부상자 등 가족들을 돌보았습니다.

항상 웃는 모습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먼저 품어주셨던 장로님.

사람들은 여사님을 ‘광주의 어머니’ ‘민주의 어머니’에서, ‘한국의 어머니’ ‘조선의 할머니’, ‘영원한 어머님’으로, 더 나아가 민주화와 겨레의 ‘대모’라고 불렀습니다. 여사님의 삶은 곧 한국 민주화의 삶이자 소외된 민중을 위한 삶 자체였습니다.

장로님께서 가신지 20여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까닭은 평생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공동체의 꿈이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사님의 삶과 업적을 올바르게 기리고 정확하게 파악하여 정립하는 일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바르게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그것으로 생각합니다.

장로님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3월 28일에 전남 나주군 반남면 대안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장로님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장로님이 6살이 돼 글을 접하자마자 가장 먼저 성경책을 손에 들려주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사시는”분이었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장로님은 11살 때 광주 수피아 여학교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게 됩니다. 광주 수피아 여학교는 미국 남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 운영되어온 미션스쿨로서 신앙과 민족애를 중시한 여성 교육의 요람이었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는 1회 졸업생인 박애순 선생의 지휘 아래 전교 학생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김양순, 최경애, 최수향 등 23명이 옥고를 치렀으며, 이런 의식의 기저에는 이 무렵 선구적인 여성 교육자였던 김필례 선생의 영향이 매우 컸습니다.

이처럼 수피아 여학교는 신앙적으로 장로님을 더욱 성숙시키는 요람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수피아 여학교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해내는 것을 이념으로 삼았던 만큼 장로님이 평생에 걸쳐 화두로 삼고 실천한 여성의 사회 참여는 수피아 여학교를 다니면서 자연스레 익히신 신앙적 삶 그 자체이셨습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장로님은 고등과 3학년생으로서 시위를 계획했다가 발각되었습니다. 이후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들이 학교에서 배운 자수와 뜨개 작품을 팔아서 군자금을 대기로 한 뒤 조직과 강령을 만들다 발각되면서 18명이 붙들려가 29일 동안 유치장에서 살고 풀려납니다. 이 사건은 동지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하려고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은반지를 끼고 다녔다고 해서 ‘수피아 백청단 은지환사건’이라고 이름 붙여졌습니다.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배격하는 기독교 교리에 따라 수피아는 9월 6일 오전 수업을 마지막으로 자진 폐교했지만, 신앙과 민족애로 일관한 수피아의 전통과 정신은 곧 장로님의 생애에 꾸준히 영향을 주었습니다.

장로님께서는 1938년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많은 교회 청년 및 지도자들과 함께 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조선의 예루살렘’이라는 평양에서 열린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와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위해 전투기 한 대를 헌납하기로 결의하자 이들 부부는 공부를 그만두고 평양을 떠나 다시 광주로 도착합니다. 그러나 불과 2개월 뒤 남편이 진성장티푸스에 걸려 숨을 거두게 됩니다. 장로님의 젊은 시절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4개월 된 둘째 아들을 남겨둔 채 장로님은 일경에 연행되었습니다. 홍역으로 얼굴이 벌게져서 우는 아이에게 젖 한 번 더 물려보지 못하고 광주경찰서로 끌려가 수피아 학교 동창회장으로서 주동한 신사참배 거부 이유를 추궁받았습니다. 27일 만에 겨우 풀려난 뒤 “혹시 세상을 떠났을지 모른다.”라는 불안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집으로 달려가 둘째 아들을 안고 눈물을 쏟으며 다짐하셨다고 합니다.

“피 한 방울 살 한 점이 남을 때까지 하나님 당신이 원한다면 이 몸으로 갚겠소.”

(유관순 누나의 절규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1. 광주YWCA 재건

장로님은 1945년 해방이 되자 광주의 여성 지도자였던 김필례, 김정현, 현덕신 등과 함께 ‘건국준비 광주부인회’를 만드는 데 참여했고, 1922년 창립되었다가 1938년 강제 폐쇄를 당한 광주YWCA 재건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그 첫 번째 사업이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쟁고아들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당시 YWCA 회관으로 몰려온 여자아이들을 돌보던 것이 계기가 되어 설립한 '성빈여사'라는 후생복지시설이었습니다.

장로님은 성빈여사-가난해도 참되게 살자-가 보육원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고아들의 의식주만을 해결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교육까지 병행했습니다. 이들이 정상적으로 교육을 받고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보람찬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여사님은 이들이 하나님의 품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아 장차 사회에 나가 여성의 지도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먹고 입고 키워주는 것만으로는 결코 사람이 성숙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한 여사님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야간중학 호남여숙도 세웠습니다. 불우한 미혼여성들의 보금자리인 양림동 계명여사도 그의 땀으로 이뤄졌습니다.

유신체제 아래서 이를 반대하는 비판세력에 대해서는 많은 탄압이 가해졌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는 학생, 목사, 신부, 교수들의 숫자가 늘어갔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인한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면서 2,000여 명의 인사들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습니다. 또한, 이들에 대한 재판과정에서 각종 고문과 조작이 자행되었음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이 고조되었습니다. 뜻있는 민주인사들이 구속되고 석방되는 과정에서 YWCA는 가입단체인 KNCC와 합동으로 각종 기도회 및 수감자 돕기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광주에서는 YMCA, YWCA, 광주 NCC, 전남 자유 수호위원회 등 4개 단체가 주관하여 10월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YWCA 강당에서 목요기도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유신반대 운동의 정점은 '민주회복 국민운동본부'였습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선생, 김재준 목사, 홍남순 변호사 등 각계 원로들이 나섰습니다. 광주전남지부장은 홍남순 변호사가 맡았습니다. 장로님은 여성위원장직을 맡아 기독교 안에서 인권운동 단체와 함께 앰네스티를 조직 결성한 후 YWCA로 집결했습니다. 그로 인해 광주YWCA에는 매일 담당 형사가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행사를 감시했습니다.

이처럼 장로님이 회장으로 재직하던 10년 기간(1973~1982) 광주YWCA가 당대 여성운동은 물론 오월 항쟁을 비롯한 지역 민주화운동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합니다. 광주YWCA는 긴급조치로 인한 구속자, 해고노동자 지원을 통해 사회운동세력과도 연대의 지점을 확장해나가면서 이들을 지원하는 중요한 주체로 자리 잡게 됩니다. 1974년 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학생·목사·신부 등을 위한 기도회와 모금 운동, 1975년 ‘동아일보 언론자유 투쟁 백지 광고사태’ 성원 운동을 전개합니다. 1978년 말에는 JOC(가톨릭 노동청년회), KNCC 등과 사회선교협의회를 구성, 노동자와 농민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등 구체적인 연대 활동들을 모색합니다.

사실 1979년 수요예배 사건은 저도 기장 전국청년회장으로 장로님과 함께 참여했다가 첫 옥고를 치르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1979년 11월 28일 민주화를 위한 수요 연합예배 사건으로 조아라 회장을 비롯하여 소설가 황석영, 강신석 목사, 명노근 장로, 김영진 장로 등 19명이 연행되었습니다. 광주 합동수사본부에 모두 합사되어 수감생활을 할 때 12·12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등 당시 육사 11기생을 중심으로 쿠데타가 일어나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수감생활이 더 혹독해졌습니다. 상징적으로 윤기석 목사와 강신석 목사만 남기고 전원 석방되었습니다. 장로님 또한 구류의 고초를 겪은 셈이지요.

이렇듯 장로님이 회장으로 계시는 동안 광주YWCA는 군부정권의 폭압에 억눌려 있던 시민들에게 숨구멍도 같은 장소였으며, 오월 항쟁 당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공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선 광주YWCA 회관을 시민들에게 개방하였습니다. 전일빌딩 뒤쪽에 자리 잡은 YWCA는 5·18기간 동안 청년·학생들의 투쟁본부였습니다. 대자보와 현수막을 작성하고 궐기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된 것입니다.

25일 오전 10시 광주YWCA에서 현 사태에 대한 민주인사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2층 YWCA 총무실에서 열린 회의에는 이성학 제헌 국회의원, 홍남순·이기홍 변호사, 송기숙·명노근 전남대 교수, 신협 이사 장두석, YWCA 회장 조아라, 총무 이애신, 윤영규·박석무·윤광장 선생 등 재야인사와 정상용·윤상원 등 청년대표 등이 참석했습니다. 이 회동에서는 도청 수습대책위 중심의 수습방안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새로운 수습방안을 모색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YWCA에서 회의가 끝난 후 재야인사들은 오후 2시 도청 뒤 남동성당에서 다시 모여 재야인사의 수습대책위 참여 문제를 본격 검토했습니다.

결국, 27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에 재투입되었습니다.

도청은 물론 대의동, YWCA 회관은 집중 사격을 당했다. 회관 건물 본관 450평과 20평의 사택은 벌집처럼 총구멍이 뚫렸습니다,

계엄군은 재야 수습대책위원들을 연행했습니다. YWCA에서도 회장인 조아라장로님과 이애신 총무가 29일 오전 5시경 형사 5명에 의해 연행되어 보안사로 인도되었습니다. 이후 보안대에서 2주간, 광산경찰서 4개월 반, 통합병원 약 1개월 등 6개월여를 갇히었다가 이애신 총무는 3년 집행유예로, 선생은 구속 중 보통 군사재판에서 징역 6년을 구형받고 법정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5·18은 만들어낸 사람이 따로 있고 우리는 피해자일 뿐이다. 하나님과 역사는 준엄한 심판으로 어느 때인가 그 진실을 밝혀주실 것이다.”

항소심 재판정에서도 70 가까운 나이의 선생은 별 두 개를 단 재판장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5·18은 틀림없이 어떤 목적을 위한 계획된 사건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계획적인 방화 사건이나 다름없는데, 어째 이 나라의 법은 방화범은 찾지 않고 불을 끄러 간 선의의 협조자를 죄인 취급하는 법정이 열리고 있는지. 상식에 어긋나기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국군들이 잔악무도하게 죄 없는 시민을 살상하고 짓밟는 그 일을 수습하러 나온 수습위원일 뿐인데 어째 내란음모죄와 내란음모 수행 임무 죄가 된다는 말입니까. 이 법정을 담당하신 재판부에 나의 간곡한 호소를 전하려 합니다. 나는 일찍 민족 비운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 잘 살았든 못살았든 이만큼 나이 먹고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 법정에 앉아있는 저 씩씩한 젊은 학생들은 학교로 직장으로, 교수님들은 교단으로, 성직자, 변호사는 그들의 본직으로 돌아가게 해주시길 간곡히 호소합니다.”

1980년 5월 정권을 장악하고 양민을 학살한 신군부는 1981년 5·18 유가족, 구속·부상자 가족을 위협하고 짓밟아 추모제도 지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광주는 분노의 신음을 토해냈고 전두환 정권의 잔학성에 몸을 떨었습니다. 당시 젊은 민주 세력들은 조아라 장로님과 이성학 장로를 앞세웠습니다. 젊은 층은 조금만 문제가 되어도 가혹한 처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장로님은 한번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5·18 관련 단체가 만들어지고 광주항쟁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운동이 전개되었고, 그때마다 장로님은 항상 한복판에 섰습니다. 특히 5·18민중항쟁으로 정신이상자가 되고 장애인이 된 이들의 어머니 역할을 묵묵히 해냈습니다. 그들과 함께 감방살이했고 그들의 옥바라지와 병간호를 몸소 했으며 결혼 비용까지 마련해주었습니다. 5·18 이후 그 유족이나 부상자, 혹은 구속자 가족을 돕는 일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힘든 몸을 이끌고 5·18 구속자 석방을 탄원하러 다녔습니다. 장로님이 생각하기에 5·18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빛나게 될 민주화를 위한 위대한 시민항쟁이라고 믿었습니다.

1982년 5월 18일 광주 YMCA회관에서 2천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민주 영령 추모예배를 열었습니다. 당국에서는 이 추모예배에 대항해 광주 공설운동장에 20여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저는 KNCC 산하 EYC라는 6개교단 전국청년회 회장 자격으로 살아남은 자로서의 회한과 다짐을 추모사에 담아 낭독했습니다. “광주학살 원흉 전두환을 처단하라” ,“5월 광주 영령의 피를 헛되이 말라.”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계엄군과 정면충돌했습니다. 이 일로 추모예배 준비위원과 광주지역 민주인사 18명이 강제 연행되었고 최종 나와 강진읍 교회의 김경식 목사가 구속되었습니다. 나로선 두 번째 구속이었습니다.

2. 청문회 이야기

장로님과의 인연에서 1988년 국회 청문회 시절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80년 5월 살육의 현장에서 국회 광주청문회가 열리기까지는 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 기간동안 계엄 신군부에 항거하고 민주주의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광주시민들은 (국회 청문회를 통해 신군부의 만행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망월동 묘지에 묻혀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한의 세월이었습니다.

다행히 국회에서 광주청문회가 전국에 TV로 생중계되면서 국민은 신군부의 잔학성을 알게 되었고, 광주시민들의 명예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광주청문회 당시 TV 시청률이 50% 가까이 됐습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정의는 살아 숨쉬기에 악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광주청문회를 15일 앞두고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께서 5·18 광주청문회를 나갈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저는 바로 다음 날 오전 7시 광주에서 홍남순 변호사, 강요한 장로, 조아라 장로, 송기숙 교수, 안성례 장로, 지선 스님, 전계량 5·18 유족회장 등 5월 단체 대표들을 만났습니다. 광주에 계시는 원로들과 학계, 교계 지도자 여러분을 모시고 보고드리고 이 난제를 같이 대처하는 것이 옳다 싶어서 자문한 것입니다. 많은 분이 자료를 내놓으셨고 시민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습니다. 덕분에 5·18 광주청문회를 철저히 준비했고, 진상이 밝혀지면서 광주의 정의로운 행동이 평가받았고,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신군부 세력은 감옥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5·18 진상 보고서가 마감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5·18 진상규명 조사위원회 활동을 통해 남은 과제를 규명하고, 발포 명령자를 밝히고 돌아오지 않은 수많은 사람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올해는 3.1혁명과 임시정부 수립 102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4·19혁명 61주년이고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이기도 합니다.

지난 2011년 5월 우여곡절 끝에 5·18민주화운동의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데 이어 4·19혁명 발생 61주년을 맞은 올해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본부에 등재 신청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코로나19와 중·일 갈등 등의 변수가 있으나 예정대로라면 2022년이면 4·19혁명 기록물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당당히 등재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프랑스 혁명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만 보아왔으나 이제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도 UN/유네스코의 국제적 공인으로 프랑스 혁명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됨으로써 우리 한민족의 우수성과 함께 우리 전 국민은 물론 특히 청년대학생들과 지구촌 175개국의 700만 한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드높이는 쾌거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학생과 시민들이 이뤄낸 값진 민주혁명의 정신과 가치가 세계만방에 드날리고 온 세계 시민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빛나는 성취를 본보기로 삼는 일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얼마나 벅차고 자랑스러운 감동이겠습니까?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위상과 자긍심이 얼마나 드 높아지겠습니까.

속옷을 기워입을 정도로 검소한 삶을 사셨던 장로님에게 남종화 대가 허백련 선생은 ‘티 없이 결백하다’라는 뜻의 호 ‘소심당(素心堂)’을 지어주셨지요.

지금 이 사회가 안고 있는 계층 간, 이념 간, 지역 간, 세대 간 갈등은 놀랍고 걱정스러울 정도로 심각한 현실입니다.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여사님의 유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온몸을 던져 자유, 민주, 정의, 평화를 위해 선한 싸움을 온몸으로 싸우신 우리 조아라 장로님이 더욱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아! 존경하고 사랑하는 조아라 장로님! 조아라 장로님! 조아라 장로님!  아! 한없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영원한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장로님!

부디 다시는 고난도 죽음도 없는 우리 주님의 영원하신 품 안에서 편히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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