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독립운동가 광주고보 출신 이경채 선생 선정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는 광복회와 함께 매월 독립운동가를 선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일(11월 3일)이 있는 11월의 독립운동가로 광주고보 출신 이경채 선생이 선정되었다.

11월 2일 전남대에 따르면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김재기 교수는 이경채 선생의 친필 미공개 자료인 <이경채의 일제와 투쟁경력(1977년 작성)>과 중국 현지자료 등을 토대로 일본과 중국으로 20여년 간 망명 디아스포라의 길을 떠났던 루트를 추적하여 한 장의 지도로 완성하였다.

이 내용은 11월 3일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와 학생독립운동연구단이 11월 3일(전남대 사회대)에 개최되는 학생독립운동 85주년 <디아스포라와 독립운동>이라는 주제의 학술회의에서 발표된다.

이경채 선생은 국권을 상실한 1910년 광주 송정리에서 태어나 1928년 광주고보에 재학중이던 10대에 학생독립운동가, 불량선인으로 낙인 찍혀 개성 소년형무소에 수감생활을 했다. 1929년 10월 20일 출옥하고 10여일 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생하여 후배들을 위해 비밀회의 등에 관여하였는데 11월말 광주경찰서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지만 증거부족으로 석방되었다.

20대와 30대에 유학생, 법학도, 고학생, 노동자, 교사, 언론인, 연구원, 군인 등 다양한 일을 하며 일본과 중국을 떠돌아다닌 국가 없는 청년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이름도 김판수, 이중환, 이일휘로 세 번이나 바꿔야했다.

이경채 선생이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것은 1928년 이경채 삐라사건과 집단 맹휴사건으로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경채 선생이 광주고보 5학년 때 <조선독립선언문>삐라를 3건이나 작성하여 배포한 사건으로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개성소년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한 후 일본 와세다대학 법률학부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도 광주고보 출신 유학생들과 비밀모임을 하고 상해임시정부와 연락을 하였다. 이에 경시청 내선과의 감시가 계속되었으며 결국 체포되어 6개월간 고문을 당한다. 이에 고베항을 통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망명 디아스포라의 길을 가게 된다.

1933년 상해에서 인성학교 교사와 1934년 임시정부가 있는 항주에서 임시정부 교통부장관 김철선생의 추천으로 임시정부기관지<대한독립보> 기자, 한국독립당 기관지 <진광(震光)>의 기자로서 독립신문을 발행하는데 참여한다. 진광은 송병조(宋秉祚, 1877-1942) 목사가 주관하고 총편집은 조소앙이 담당하였으며 신익희(申翼熙)선생을 비롯하여 양기탁(梁起鐸)·김두봉(金枓奉)·김사집(金思集), 박경수(朴敬洙등이 간여하였다.

1935년에는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 직할 일본연구소(소장 장백리(蔣百里),중국육군대학 초대교장)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일본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의 유학경험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 때 장백리 소장은 이경채의 이름을 이일휘(李一 輝)로 개명한다.

1936년 남경 중국군사학교에 13기로 입교하게 되는데 1935년 이후 한인학생이 입학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유일한 사례이다. 이경채 선생이 속한 진성 장군의 상해방면군 적총사령부(敵總司令部)(제 15집단군)은 제3 전구(사령관 풍옥상)에 편제되어 남경·상해·강소성·절강성을 관할하게 되었다.

1937년 10월 중국 육군 제11사에 배속되어 중일전쟁에 참전하면서 호북성 무한, 사천성 동양, 호남성 장사, 호북성 파동, 귀주성 계림, 안휘성 임천 등에서 항일전쟁에 참여한다. 1945년 중국육군군관학교(육군대학) 군관고등군사반 11기에 입교한 이경채 선생은 고등군사교육을 받았는데 중교(중령)으로 469명의 장교 중 유일한 한국인이다.

이 때 별호로 광군(光軍:광복군 의미)으로 칭했으며, 원적지가 유일한 한국인으로 <韓國全羅南道松汀里>로 적혀있다(사진자료). 중국 군대의 중교(중령)으로 재직 중 1949년 일본을 통해 고향인 광주로 20여년 만에 돌아왔다. 이경채 선생은 3번의 검거와 투옥, 3번의 개명을 하며 20여년 동안 20여개 지역을 떠돌아 다니는 망명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나라 없는 조선 청년학생들은 일본과 중국 소련 등으로 망국의 한을 품고 디아스포라가 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경채 선생의 이동 루트를 지도로 완성하여 독립운동 교육 자료로 활용이 가능하다. 디아스포라의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사건들을 스토리텔링화 하여 영화와 연극 등 문화예술활동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경채선생의 이동루트를 따라 역사현장을 탐방하는 한중 교류협력 프로그램으로도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특히 광주광역시가 역점적으로 준비중인 ‘중국과 친해지기’ 프로그램의 하나로 활용이 가능하다. 안중근 의사와 정율성 선생을 통해 한중간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듯이 이경채 선생의 독립운동의 행적을 공유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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