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고의 자화상 국보 제240호 윤두서 자화상 등 200여 점 전시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은 2014년도 가을 기획특별전으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를 개최한다. 특별전에서는 공재 윤두서(1668~1715)로 부터 아들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1685∼1776), 손자 청고靑皐 윤용尹愹(1708∼1740)에 이르는 윤두서 일가의 서화세계를 조망한다.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덕음산에 위치한 녹우당은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漁樵隱公派의 근거지로, 호남지역 전통 화단의 토대를 이룬 산실이다. 공재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증손으로 169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쟁이 심하던 시기였기에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며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 윤덕희는 가전화풍을 이어 말 그림 뿐 아니라 남종화풍의 산수화, 도석 인물화와 용 그림龍圖을 잘 그렸으며 윤용은 정밀한 묘사와 풍속화에 뛰어났다고 한다. 이들은 당대인들로부터 조선 후기 화단의 선구자로 지목받았다.

조선시대 최고의 자화상인 국보 제240호 윤두서 자화상과의 만남은 이번 가을 박물관을 찾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이다. 이외에도 보물 제481호 『가전보회家傳寶繪』와 『윤씨가보尹氏家寶』, 윤두서의 명작 중 하나인 <노승도>, 18세기의 조선을 그린『대동여지지도』와 『일본여도』를 비롯하여 녹우당으로부터 첫 나들이를 하는 귀중한 그림과 서책, 인장 등 200여 점의 작품이 특별 공개된다.

윤두서는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기존에 다뤄지지 않던 주제를 선구적으로 수용하였고, 현실의 세계와 사람들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담아 조선 회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전시를 통해 선비화가였던 윤두서의 다양한 회화세계와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서화뿐만 아니라 유학, 천문지리, 수학, 병법 등 각 방면의 학문에 능통한 실학적인 태도는 가풍으로 전해졌다.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그의 외증손이다.

윤두서는 조선 후기 회화사의 시작을 알리는 시대의 선구자이다. 그는 조선 중기와는 달리 사생과 관찰을 중시하는 사실주의적인 회화관을 지녔다.
윤두서 자신의 회화관은 그의 화평이 수론된 『기졸記拙』의 「자평自評」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필법이 공교로워야 하고 묵법은 그 묘미를 터득해야 하는데, 이 두 가지 법이 화합을 이루어야 ‘그림[畵]’이 ‘도道’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또 화도畵道에 이르는 화품을 5가지로 구분하여 도道, 학學, 지識, 공工, 재才를 제기하였다. 즉 만물을 포괄하여 헤아릴 수 있는 것은 화지畵識이며, 형상의 의표意表를 터득하여 실행하는 것은 화학畵學이고, 만물의 척도가 되는 작대의 제작은 화공畵工이며, 마음먹은 대로 표현할 수 있는 손의 능력을 화재畵才라 하였으며 이들을 모두 갖추어야 화도를 이룰 수 있다는 회화관을 나타냈다.
이는 정확한 관찰과 사생을 통하여 대상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회화관이며 단순히 사의寫意만을 강조하는 기존의 회화관과는 차별성을 보인다. 동시대인인 남태응南泰膺(1687-1740)의 “말을 그릴 때면 마구간 앞에 서서 종일토록 주목해 보기를 몇 년간 계속했다. 말의 모양과 의태를 마음의 눈으로 꿰뚫어 볼 수 있고 털끝만큼이라도 비슷함에 의심이 없는 후에야 붓을 들어 그렸다.”는 의 언급에서도 그림에 대한 윤두서의 태도를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 그림은 단순히 여기餘技와 취미가 아니며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궁극에 도달하는 격물格物에 다름 아니었다.

전시는 제1부 윤두서의 가계와 생애, 제2부 윤두서의 서화세계, 제3부 윤덕희, 윤용의 서화, 제4부 윤두서 일가의 회화가 후대에 미친 영향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구성하였다. 제1부에서는 넓고도 깊게 학문을 추구하는 해남윤씨가의 박학博學의 가풍이 윤두서의 학문 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 학문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와 새로운 문물에 대한 탐구는 그림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동일하였다. 그에게 있어 그림은 단순히 여기餘技와 취미의 산물이 아니며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궁극에 도달하는 격물格物에 다름 아니었다.

제2부에서는 윤두서의 회화에 대해 산수화, 인물화, 풍속화, 말 그림 등의 화목별로 분류하여 살펴본다. 조선 후기 화단에서 윤두서는 󰡔고씨화보顧氏畵譜󰡕, 󰡔당시화보唐詩畵譜󰡕와 같은 다양한 화보를 통하여 남종화 및 작화 방법론의 유행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윤두서가 추구했던 박학의 풍모는 회화적인 면에서도 나타나 산수화, 초상화, 도석인물화의 제작에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으며, 지리와 병법兵法, 풍수에 대한 관심으로 <동국여지지도>, <일본여도> 등 회화식 지도를 제작하였다.

제3부에서는 윤덕희와 윤용의 회화를 통해 윤두서의 화업을 이어받아 3대에 걸쳐 문인화가로 일가를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윤덕희는 부친의 영향을 받아 남종화, 산수화, 풍속화, 인물화 등 다양한 화목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신선 그림과 말 그림으로 유명하였다. 윤용은 윤두서와 같이 화가로서 대성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으며 산수화와 풍속화, 도석인물화 등에 두루 재능을 보였다.

제4부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윤두서를 배우려 했던 화가들,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가들을 조망한다. 정선, 조영석, 심사정, 강세황, 강희언과 같은 문인화가를 비롯하여 김익주, 김두량, 김홍도, 이인문, 김득신 등의 직업화가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의 화가들은 윤두서가 연 새로운 지평에서 자신들의 길을 열어나갈 수 있었다. 윤두서는 새롭고 다양한 주제의 모색, 화보와 판화와 같은 새로운 매체의 활용, 선비의 이상과 격조를 담아낸 그림과 풍속화, 정물화의 개척, 회화의 수장과 감평, 화론의 저술 등 여러 방면에서 조선 후기 화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윤두서 일가의 회화는 조선 말기에 활약한 소치小癡 허련許蓮(1809~1892)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허련은 전라남도 진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이 뛰어났지만 제대로 된 교재나 스승이 없어 체계적인 그림 공부를 할 수 없었다. 28세 때인 1835년에 비로소 해남 녹우당에 소장된 윤두서와 윤덕희의 그림을 보고 임모臨摹하면서 그림에 눈을 뜨게 되었다.

허련을 해남윤씨 집안의 인물들과 교유하게 연결시켜 준 인물은 그의 첫 번째 스승인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였다. 허련은 28세 때 초의선사가 거처한 대둔사 일지암에 방을 빌려 거처하면서 그림과 글씨를 배웠다. 이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해남 녹우당을 방문하여 윤종민尹鐘敏(1798~1867) 형제들을 만나 교유하게 되었으며, 그곳에 소장된 윤두서와 윤덕희의 그림과 『고씨화보顧氏畵譜』 등을 빌려 보고 그림에 법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허련은 32세(1839) 때 역시 초의선사의 소개로 상경하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남종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수련하여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성장하였다.

허련의 회화는 넷째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瀅(1862~1938),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楗(1908~1977) 및 방손傍孫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 등으로 계승되며 호남화단의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호남회화 300년의 궤적은 윤두서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늘날 호남이 예향藝鄕으로 불리며 지역적 특색을 갖추게 된 것은 윤두서 일가의 업적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번 전시를 통해 윤두서를 선두로 한 조선 후기 회화사의 새로운 문화사적 의미와 300년에 걸쳐 이어지는 호남화단의 흐름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윤두서의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여 마련된 이번 특별전은 창사 50주년을 맞은 광주 MBC, 해남 녹우당과 공동으로 주최한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선묘 위주로 나타내던 전대의 전통에서 탈피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목구비 등 외형만을 단순하게 묘사하거나 개념적으로 처리하기 보다는 얼굴을 구조적으로 파악하여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구현하려 했던 윤두서 자신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획 하나 점 하나 소홀하게 다루지 않고, 수염과 코털의 속까지 세밀하게 나타낸 점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윤두서 자화상의 특징은 특이한 구성에 정교한 필선이 전하는 사실성에 있다. 정면상에 팔자 수염과 구레나루 등이 모두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그가 세상을 하직하기 전 완성한 자화상은 비록 초본이지만 자신의 심상을 강렬하게 표출시킨 역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먼저 눈동자는 강렬한 빛을 발하여 살아있는 듯 위엄에 차 있으며, 그로 인해 결연한 내면의식과 지식인의 충만한 기개를 잘 보여준다. 탕건의 윗부분을 생략하고, 눈은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듯 묘사하였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좌안 7, 8분면상이 많은 반면정면상은 드문 편이다.

윤두서의 엄정한 성격과 조선 지식인의 옹골찬 기개를 엿볼 수 있는 이 그림은 극도의 사실성을 부여하여 진정한 내면세계와의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한국 초상화의 대표작으로 거론되어왔다. 그러나 반신상과 이목구비의 표현 등 외형적인 특징뿐만이 아니라 제작 기법과 관련하여 오랫동안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귀와 몸체를 과감하게 생략한 채 두상만 그린 그림이 아니라 유탄으로 상체를 그렸지만 그 위에 먹선을 올리지 않아 귀와 의습선이 사라졌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상체 표현이 생략된 것은 전체 윤곽을 뒷면에서 먹선으로 틀을 잡아 앞면에 비치게 하고, 그림을 그리는 배면선묘背面線描의 결과라고 보았다. 표현기법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의하면 1937년에 편찬된『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에서처럼 원래 도포차림의 반신상으로 그려졌음이 확인되었다. 얼굴 윤곽과 턱밑의 긴 수염, 얼굴 옆의 구레나루 수염, 귀 등도 세밀하게 묘사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그림은 형사와 전신을 요구하던 전통 초상화의 규칙에 일대의 변화를 주도한 18세기 초상화를 대표한다.

대도를 깨우치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수행과 구도의 길을 떠나는 듯한 노승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염주를 끼고, 나무지팡이를 든 채 걸어가는 구부정한 모습과 마른 얼굴에 꾹 다문 입술의 진지한 표정은허공과 같은 큰 마음과 대비원력大悲願力이 품어져 있는 듯하다.

윤두서의 도석인물 중에서 승려를 소재로 삼은 그림들이 많은 편이다. 이 노승도는 이하곤(1677~1724)이 제題한 시에서 묘사한 지팡이에 기댄 채 앉아있는 노승을 그린 그림을 연상하게한다.

사선식 구도에 대나무 가지와 풀잎을 단순하게 포치하였고, 필묵의 농담을 잘 대비시켜 문기어린 수묵화의 특성을 최대한으로 살린 작품이다. 배경을 단순화하고 인물을 부각시킨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 형식을 보여주는 이 그림은 노승의 인체, 즉 이목구비와 손을 가늘고 섬세한 필선을 사용하여 간략하게 묘사하였다. 반면 가사자락을 굵고 진한 필치로 표현하여 거친 느낌과 함께 육중한 느낌을 준다. 거침없는 필치로 어깨위로 걸친 지팡이는 뛰어난 구성과 화면 효과를 상승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은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언덕에서 공기놀이를 하는 두 소년과 바람개비를 든 소년을 묘사하고 있다. 주위의 바위와 수풀을 깔끔하게 처리하여 단정한 맛과 품격 있는 공간을 연출하여 그 안에 공기돌을 가지고 노는 어린이들을 배치하였다. 조선 후기 이규경의『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우리나라 아이들이 둥근 돌알을 가지고 노는 놀이가 있어 ‘공기’라고 한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공기놀이는 조선시대 훨씬 이전부터 성행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파릇파릇한 버드나무 밑에서 어린아이들이 새알만한 공기돌을 가지고 노는 장면과 이를부러운 시선으로 지켜보는 아이의 모습을 등장시킴으로써 놀이의 재미와 화면에 극적인 효과를 높여주고 있다. 아이들의 시선은 허공에 던져진 두 개의 공깃돌에 모아져 있으며, 손가락이 유난히 길게 표현되어 있다. 반면 인물의 자세와 표정, 옷차림 등은 윤두서의 작품에서처럼 부드러운 선묘와 능숙한 필치로 나타내 자연스러움을 더해준다.

<관폭도>로 도안적인 폭포의 형태나 중심인물부터 시동에 이르기까지 12명의 인물을 비중에 따라 크기를 다르게 한 점 등이 고식적이다. 중심인물은 다른 인물들에 비해 세밀하게 묘사되어 시정에 잠긴 표정이 느껴진다. <관폭도>는 조선중기에 유행한 소경산수인물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나 조선 중기의 관폭도에서는 인물이 폭포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에 비해 이 작품에서는 인물들의 시선이 폭포를 향하고 있지 않은 점에서 새로운 변화가 느껴진다.

윤두서와 윤덕희 부자는 말을 잘 그렸던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들의 말 그림은 조선후기 문인들에게 중국의 한간韓幹과 조맹부趙孟頫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특히 윤덕희는 아버지 윤두서와 달리 살진 체구의 대완마大宛馬(*대완국은 한대 서역의 명마 산지를 뜻함)를 잘 그렸다고 전한다.

호복 차림의 미인이 주인공인 이 작품 역시 등에 반점이 어릿하게 있는 푸른 말을 그려 이국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아무런 배경 없이 인물과 말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그렸고, 화면 왼쪽 상단에 “병진년(1736) 여름 둘째 아들 용에게 그려준다”는 내용의 관지와 ‘회심루會心樓(윤덕희의 당호)’의 백문인, ‘경백敬伯’의 주문인이 있다.

갈기털을 말끔히 손질한 말은 둥글게 등을 구부리고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눈망울이 크고 유순해 보여 미인이 타기에 알맞게 보인다. 말을 그린 선이 자연스럽게 화면을 상하로 나누면서 인물에 시선이 집중된다. 말 위의 미인은 상체를 오른쪽으로 틀어 약간 뒤쪽을 향하고 있다. 몸은 거의 정면이고 얼굴은 4분의 3면에 가깝다. 검은 머리카락과 흰 피부에 길고 가는 눈을 살짝 내리떴고 코는 오똑하며 입술은 작고 붉은 미인이다. 붉은색 내의 위에 흑색 겉옷을 입고 흑색 두건을 썼으며, 소매는 고삐를 잡을 때 펄럭이지 않도록 끈으로 동여맸다.

비단옷에 걸맞게 안장과 여러 가지 마구도 화려하게 갖추었다. 이국적인 풍모의 말과 미인을 그린 호사적인 그림으로, 인물과 말 그림에 뛰어났던 윤덕희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윤두서의 9남3녀 가운데 장남인 윤덕희의 둘째 아들인 윤용은 윤두서와 윤덕희의 그림 재능을 이어받아 가법家法에 따르는 그림을 남겼다. 산수화, 풍속화, 도석인물화, 초충·화조화 등을 두루 잘 그려 화가로서 대성할 자질을 가졌지만 33세에 요절하여 현재 전하는 작품은 20여점 안팎에 불과하다. 조선 후기의 대수장가인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의 《화원별집》 안에 들어 있는 <강정완월도>는 달밤에 강가의 누각에서 두 인물이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다. 근경은 진한 먹으로 하고 중경, 원경으로 갈수록 옅은 먹을 써서 자연스러운 거리감을 느끼게 하였다.

문인들의 여유롭고 평화스런 일상의 모습이 담담한 붓으로 표현되었으며 이상화된 산수가 아닌 자신의 주변을 소재로 작품을 하는 오파 남종화풍을 반영하고 있다. 두 인물이 앉아 있는 건물이 우리나라 식의 누각이고 강 건너편 마을 역시 우리나라 가옥으로 되어있으며 중경의 가운데에 강변 쪽으로 성벽이 보이기 때문에 한양 주변의 실경을 그린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우연히 붓을 놀리면 역시 하늘이 낳은 재주라 안개와 구름 싸인 풀과 나무…깊고 옅고 쓸쓸한 것들이 모여 만 가지 변화를 이루어 신묘한 경지를 다했다”고 평한 고모부 신광수申光洙의 평을 연상하게 하는 작품이다.

강희언은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운景運, 호는 담졸澹拙이다. 1754년(영조 30)에 운과雲科(음양과의 이칭)에 급제한 뒤 감목관監牧官을 지냈다. 서울 삼청동에서 34세나 위인 선배화가 정선鄭歚과 이웃하여 지내면서 그로부터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강세황姜世晃과 교유가 깊었으며, 35세나 아래인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김홍도金弘道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김홍도는 1778년 여름에 강희언의 집에서 풍속도 병풍을 그리기도 하였다.

이 그림은 윤두서의 <석공공석도>를 임모한 것으로 그림이 속해 있는 『화원별집』에도 “澹拙學恭齋石工攻石圖”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개울 옆에 있는 암석에서 돌을 떼어내려 정을 대고 망치로 내리치려는 순간을 포착하였다. 윤두서의 그림을 충실하게 임모하여 구도, 형식 뿐 아니라 노인 옆의 도구들을 비롯하여 옷 주름과 나뭇잎, 풀잎 하나까지도 똑같이 그렸다. 다만 윤두서의 원작에 비해 인물의 자세와 표정이 조금 경직되어 있다.

〈나물캐기〉는 조선회화사상 시골 아낙네들의 노동하는 삶을 과감하게 주인공으로 삼은 최초의 예이다. 고개를 돌린 여인의 뒷모습은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던 자세로 매우 독창적이다. 뾰족한 점으로 표현된 풀들 사이로 이파리가 땅에 바짝 붙어 있는 나물들이 군데군데 보이고, 한손에 망태기와 다른 손에 칼을 들고 허리를 구부린 여인과 고개를 돌린 여인의 시선이 캐고자하는 나물에 꽂혀 있어 사실성을 추구하는 예술정신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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