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잘리고 칼에 찔려 순국’, 정재상 하동문화원 위원장 문건공개

최근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할머니 등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일제에 의해 학살당한 항일투사 259명의 문건을 한 향토사학자가 찾아 신원이 확인된 의병장 41명을 정부에 서훈신청(2014년 2월4일, 진주보훈지청 보훈과를 통해)하고 명단을 공개했다.

27일 하동문화원에 의하면 이번에 찾은 문건은 구한말 을사늑약(1905년)이후 1907~1909년 국내에서 50~400여명의 의병대를 조직 숱한 무장투쟁을 벌이다 일제의 ‘남한 대 토벌 작전’때 체포되어 총살당하거나 목이 잘리고 칼에 찔려 순국한 항일의병장 41명과 무명항일투사 218명의 문건이다.

이번에 문건을 찾아 서훈을 신청한 정재상 경남 하동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경남독립운동 연구소장)은 “이번자료는 일제가 작성한 ‘진중일지’(토지주택박물관 소장)와 ‘폭도에 관한 편책’(국가기록원) 그리고 ‘조선 폭도토벌지’ 등에서 미 서훈 항일의병장 41명(경남12명 경북14명 전남8명 전북5명 강원2명)과 무명항일투사 218명의 학살문건을 찾았다”고 밝혔다.

정위원장이 찾은 이번문건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경남 하동출신 정승유(鄭勝有)의병장의 체포, 탈옥, 총살과정과 합천출신으로 일본군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 끝에 칼로 도륙당한 신상호(申相鎬)의병장, 의령의 문봉래(文奉來)의병장, 강원도 삼척 육백산을 중심으로 대활약을 펼친 김수영(金壽榮)의병장, 경북 경주의 권문선(權文善)의병장, 그리고 체포된 후 일본군 숙사에서 머리가 박살나 처참하게 순국한 전남 곡성의 손학곤(孫學坤)의병장, 경남 함양에서 마을이장으로 활동하며 격문을 돌리다 체포되어 총살당한 김찬언(金贊彦)의병장, 일본군에 체포된 후 칼에 찔려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전북 장수의 박재근(朴在根)의병장, 목이 잘려 순국한 진안출신 김진명(金辰明)의병장, 구한말 한병(군인)출신으로 의병대의 훈련교관을 지내다 체포되어 총살당한 경남 하동출신 이덕길(李德吉)의병장 등 일제에 의해 학살당한 41명의 의병장과 강원도 태백시 황지(黃池)에서 일본군의 칼에 찔려 한꺼번에 50명이 학살당한 문건이 이번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정재상 위원장은 “이번문건에 드러난 의병장의 학살은 ‘도주를 기도함에 죽였다’고 상부에 보고했다”며 “항일의병장을 죽이는 명분이 모두 도주라는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는 표현을 쓰며 항일투사들의 학살을 자행했다”고 밝혔다. 또 그는 “체포된 항일의병장을 고문한 후 마지막에는 목을 자르고, 머리를 박살내 죽이고, 칼로 잔혹하게 찔러 죽여 놓고 그들이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했다,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었다고 밝히고 있어 정말 천벌을 받을 짓이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이번에 찾은 41명의 의병장에 관해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에 서훈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미 서훈자로 밝혀졌다”며 “이번문건은 의병장들의 뚜렷한 항일기록이 있는 만큼 독립유공자 서훈에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순국한 항일의병장 41명 서훈신청자 공적요지

<강원 2명>
▲김수영(金壽榮~1907 12 19·강원도 삼척 도계 육백산)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상북도 북부지역과 강원도 육백산(六百山), 탕실(湯實), 석개(石開)등지에서 의병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7년 12월17일 강원도 삼척 도계 육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체포되어 12월19일 총살됐다.

항일의병 50명 한꺼번에 칼로 찔러 죽여
▲김성산(金成山~1907 11 18·강원도 태백시 황지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강원도 삼척군 장성면 황지(黃池)에서 의병 150여명을 지휘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그러던 중 그는 1907년 11월18일 소백산맥에 있는 강원도 황지 및 경북 봉화군 고직령(古直嶺)부근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의병 50여명이 일본군의 칼에 찔려 한꺼번에 전사하고 그는 체포되어 격살(擊殺)됐다.

<경남 12명>
정승유 의병장, 감옥 부수고 탈옥 체포 총살
▲정승유(鄭勝有~1908 12 15·경남 하동군 진교면)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박매지등과 함께 하동, 산청, 진주 등지에서 의병300여명을 규합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러던 중 정승유는 1908년 7월 중순 하동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체포되어 하동경찰서 감옥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수감되어 있던 박인환(박매지) 권석도 등과 함께 감옥을 부수고 탈옥했다.
그는 이후 계속 항일투쟁을 벌이다 12월15일 하동진교에서 또다시 체포되어 압송되던 중 하동군 양보면 봉곡촌(鳳谷村)에서 동지 2명과 함께 총살됐다.
신상호 의병장, 칼에 찔려 참혹한 죽음 맞아

▲신상호(申相鎬·36세, 1872~1908 8 31·경남 합천군 봉산면 송림)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남 합천군 가야산 일대와 산청군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31일 합천군 삼가 평구(平邱)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휘하 의병 4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신상호 의병장만 칼로 잔인하게 찔러 죽였다.

▲김홍대(金弘大~1907 10 28·일명 김창석·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인 함양, 산청, 남원, 무주, 장수 등지에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그러던 중 1908년 5월12일과 13일 함양남방 약 50리 지점인 마천면 추성(楸城)에서 의병 60여명을 지휘하며 격전을 벌였으나 의병10명이 전사 했다.
이후 김홍대는 10월28일 오전6시 함양군 북방 약 150리 부근 대곡동(大谷洞)에서 체포되어 총살됐다.

▲백운하(白雲下~1908 8 21·경남 밀양 무안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상남도 밀양과 경북 청도를 중심으로 의병6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 21일 밀양군 무안동(密陽郡 武安洞) 부근에서 의병6명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되었다. 날 백운하 의병장을 비롯한 7명이 총살됐다.

▲이두익(李斗益~1908 5 20·경남 삼가군 모고면)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남 합천, 삼가, 거창 등지에서 의병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는 특히 손태주(孫太朱·마산), 이준명(李俊明·성주), 영기선(榮基善·영산)등 의병 수십명과 함께 1908년 4월8일 합천 우체국을 공격했다. 그러던 중 5월20일 삼가군 모고면(毛古面)에서 체포되어 총살됐다.

▲이안옥(李安玉~1908 8 31·경남함양군 휴천면 목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함양, 산청, 진주등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8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 31일 함양군 동남쪽 15리 목동(木洞)부근에서 동지 2명과 함께 체포되어 산청군 서방 약 40리 오봉산(五峯山)에서 총살됐다.  그리고 동지 2명은 9월 2일 함양군 추성(楸城) 남방 40리에서 총살당했다.

▲김순오(金順吾~1908 9 15·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촌)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이후 지리산일대인 경남 함양군과 산청군 일대에서 수십명의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8년 9월15일 김찬언(金贊彦)등과 함께 함양군 일대에서 격문을 돌리다 체포되어 총살됐다.

▲김찬언(金贊彦~1908 9 15·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촌)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이후 지리산 일대인 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촌(倉村)에서 마을 동장(洞長)을 하면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1908년 9월15일 같은 마을 김순오(金順吾)와 함께 격문을 돌리다 체포되어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김진규(金振奎~1908 4 25·경남 거창군 가북면 심방)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이후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인 거창에서 유종환(兪宗煥)의병장의 부장(副將)으로 활동하며 거창인동, 신방, 도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4월25일 유종환, 김진규등 의병24명이 거창군 인동(거창 동북 약30리)에서 숙영했다.
이후 이들은 거창 동북방 약45리 심방(尋芳)에서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이다 김진규를 비롯한 의병9명이 전사하고 유종환등 4명은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문봉래(文奉來~1908 6 7·경남 의령군 가례면 갑을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의병150여명을 지휘하며 경남 의령, 창녕 등지에서 일본군에 맞서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6월6일 의령북방 약30리 부근 갑을동(甲乙洞)에서 문봉래가 지휘하는 의병50명이 주둔했다.

이후 문봉래의진은 6월7일 갑을동 부근 양성동(陽成洞)학교에서 숙영 중 새벽2시에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문봉래를 비롯한 의병12명이 전사했다.

▲성만석(成萬石~1908 8 3·경남 합천군 삼가면 목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남 황매산일대인 삼가군, 합천군 등지에서 의병 7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3일 삼가군 서북 35리 부근인 목동(木洞) 서남 5리에서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였으나 성만석을 비롯 5명이 전사했다.

▲이덕길(李德吉~1909 3 21·경남 하동군 악양면) 의병장은 구한말 한병 상등병(군인) 출신으로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 부터 지리산 일대인 하동 산청 함양 진주 구례 곡성 광양등지에서 이학로, 박매지, 황낙현, 노성화, 최경순, 우수보, 권석도, 전재수, 심상근, 이춘이, 김채홍, 송명운등과 함께 의병3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그는 특히 의병대의 훈련교관으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1909년 3월14일 산청군 백곡면(栢谷面) 신대리(新垈里)에서 일본군 매계(梅溪)수비대와 교전을 벌이다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3월21일 총살됐다.

<경북 14명>
▲권문선(權文善~1908 5 28 ·경북 경주군 산내면 감존)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이후 경북 경주군 일대에서 의병 5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5월28일 경주군 감존(甘存)에서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였으나 체포돼 총살됐다.

▲김성달(金聖達·27세, 1880~1907 9·경북 문경군 신동면 노목)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북 일원에서 의병 6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7년 9월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다 체포된 후 발각되어 총살됐다.

▲김용출(金用出·25세, 1882~1907 9·경북 화안군 달미면 광동리)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 초부터 경상북도 일원에서 60여명의 의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던 중 1907년 9월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다 체포돼 총살됐다.

▲김직현(金直玄·32세, 1875~1907 12 14·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화리)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경주출신의 이모(李某) 의병장과 함께 1907년 초부터 영천, 청송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7년 12월14일 영천군 신촌면 하란동(新村面 下蘭洞) 부근에서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중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이다 총상을 입고 체포된 후 순국했다.

▲박인시(朴仁是~1908 8 26·경북 고령군 명곡)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북 고령과 경남 거창일대에서 의병 15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26일 의병20여명과 함께 경북 고령군 서북방 약35리 지점인 명곡(明谷)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휘하의병 15명이 전사했다. 이날 박인시 의병장은 체포되어 총살됐다.
▲이로침(李魯浸~1908 10 27·경북 구미시 백산면)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구미에서 이선달(李先達), 이병기(李炳基)등과 함께 의병 9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10월27일 백산(栢山·인동 서방 약 15리) 남방에서 이병기와 함께 체포되어 총살됐다.

▲이병기(李炳基~1908 10 27·경북 구미시 백산면 인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구미에서 이선달(李先達), 이로침(李魯浸)등과 함께 의병 9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10월27일 백산(栢山·인동 서방 약15리) 남방에서 이로침과 함께 체포되어 총살됐다.

▲김백룡(金白龍~1908 12 10·경북 개녕군(김천시) 연명면 입석리)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황방우(黃方右), 최무용(崔武用), 정파총(鄭把惣)등 100여명의 의병과 함께 경상북도 일원인 개녕군(지금의 김천시)과 성주군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10일 김천(金泉)수비대에 의해 황방우와 함께 체포되어 성주군(星州郡) 왕성(旺星)에서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황방우(黃方右~1908 12 10·경북 개녕군(김천시) 연명면 수오리)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김백룡(金白龍)등 100여명과 함께 경상북도 일원인 개녕군(지금의 김천시)과 성주군(星州郡)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10일 김천 수비대에 의해 김백룡과 함께 체포되어 성주군 왕성(旺星)에서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최무용(崔武用~1908 12 10·경북 개녕군(김천시) 농소면 봉현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최일진(崔一進), 정파총(鄭把惣)등 1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경상북도 개녕군(지금의 김천시)과 성주군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10일 김천수비대에 의해 정파총과 함께 체포되어 성주군 왕리에서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정파총(鄭把惣~1908 12 10·경북 개녕군(김천시) 농소면 신촌)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최일진(崔一進) 최무용(崔武用) 형제 등 1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경상북도 개녕과 성주, 김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10일 김천수비대에 의해 최무용과 함께 체포돼 성주군 왕리(旺里)에서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최일진(崔一進~1908 12 10·경북 개녕군(김천시) 농소면 봉현동) 의병장은 1907년부터 동생 최무용, 정파총등과 함께 경북 개녕군(지금의 김천시)과 성주군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중 1908년 12월 10일 김천수비대에 의해 체포되어 12월 11일 김천에서 총살됐다.

▲박부장(朴部將~1908 4 3·경북 성주 거구리)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이후 경상북도 성주등지에서 박봉래(朴鳳來)의병장등 400여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4월2, 3일 박부장은 지례(知禮 지금의 금릉金陵) 남방 약30리 지점인 평촌(平村), 지소(평촌 동방 약5리), 거구리(巨句里) 등지에서 의병 200여명과 활동하고 있던 중 4월3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교전하다 최지(崔地)등 13명이 장렬히 전사했다.

▲김성칠(金成七~1907 12 19·경북 봉화군 황엽령)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이후 1907년부터 경상북도 봉화군일대에서 채모(蔡某)의병장과 함께 의병2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7년 12월9일 일본군 수비대와 황엽령(黃葉領) 백산 서방에서 교전을 벌이다 채의병장을 비롯한 의병31명이 전사하고 김성칠은 체포되어 총살됐다.

<전남 8명>
손학곤 의병장, 머리가 박살나 처참한 최후 맞아
▲손학곤(孫學坤~1908 4 29·전남 곡성군 죽곡면 동계리)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지역인 곡성 구례 광양 하동 남원을 중심으로 소광선(蘇光先)의병장과 함께 의병15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8년 4월28일 무렵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남 곡성군 동계리에서 체포됐다. 이후 그는 4월29일 일본군 숙사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후 머리가 박살나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정섭(李丁燮~1908 11 7·전남 함평군 식지면)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그의 부친 이남규(李南奎)와 함께 기삼연 의진에서 맹활약했다.

그러던 중 1908년 11월7일 그의 부친 이남규(기삼연의 후군장)와 전주 남문밖에 살고 있던 이내구(李內逑)와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되어 3명 모두 총살됐다.

▲김권석(金權石~1908 7 7·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범계리 천평) 의병장은 을사늑약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구례, 곡성, 남원, 하동 등지에서 의병 2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8년 7월7일 전남 구례(지금의 곡성군) 천평(川坪·구례 서남방 약 50리)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김권석을 비롯한 4명이 전사했다.

▲김학삼(金學三~1908 6 14·전남 구례군 구례읍 독자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전남 구례에서 신모 의병장의 부장(副將)으로 활약하며 일제에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8년 6월14일 김학삼은 의병30명과 함께 구례군 독자동(讀子洞)에서 일본군과 조우 치열한 격전을 벌이다 김학삼을 비롯한 9명이 전사했다.

▲최상광(崔相光~1908 6 14·전남 구례군 마산면 상사리 )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구례, 곡성, 광양, 하동, 남원등지에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중 최상광은 1908년 6월 14일 전남 구례군 상사리(上沙里·구례 동북방 약 10리)에서 의병 20여명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최상광을 비롯한 6명이 전사했다.

▲김례중(金禮中~1908 4 7·전남 나주 월명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전남 나주를 중심으로 의병 70여명을 지휘하며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김례중은 1908년 4월7일 나주 서방 약 20리 월명동(月明洞)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체포되어 총살됐다.

▲김옥내(金玉內~1908 4 26·전남 곡성군 죽곡면 유봉리 비봉)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곡성 구례 광양 하동 남원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며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러던 중 1908년 4월26일 전남 곡성군 죽곡면 비봉리 (飛鳳里)에서 일본군 북부수비대와 교전을 벌이다 체포되어 총살됐다.

▲김문삼(金文三~1908 12 5·전남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이후 1907년부터 조규하(趙圭夏)의병장과 함께 의병 3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조쥬하 의병장이 전사하자 그를 대신해 김문삼은 의병장이 되어 광주, 순천, 곡성, 구례 하동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1908년 12월5일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谷城郡 竹谷面 泰安寺)에서 휘하의병 4명과 체포됐다. 이후 본군은 김문삼과 의병 1명을 총살했다.

<전북 5명>
김진명 의병장, 목이 잘려 순국
▲김진명(金辰明·44세, 1863~1907 12 1·전북 진안군 진안읍)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 초부터 전북 진안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대일 항전의 기치를 올렸다.  그러던 중 1907년 10월19일 진안 결찰서와 우체국 등을 습격하였다.   이후 그는 12월1일 일본군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 끝에 참수(斬首·목이 잘려) 순국했다.

박재근 의병장, 칼에 찔려 처참한 죽음 맞아  ▲박재근(朴在根~1907 12 28·전북 장수군 계북면 임평리 백암)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 초부터 의병100여명을 규합  전라북도 장수, 무주, 남원 등을 중심으로 덕유산과 지리산을 넘나들며 대일 항전의 기치를 올렸다.

그러던 중 1907년 12월27일 장수남방 약50리 백암(百巖)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28일 일본군의 모진 고문 끝에 칼에 찔려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이내구(李內逑~1908 11 7·전북 전주 남문 외)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기삼연 의진에서 이남규(李南奎)와 이정섭(李丁燮)등과 함께 의병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1월7일 이남규, 이정섭과 함께 체포되어 3명 모두 총살됐다.

▲마중길(馬中吉~1908 5 16·전북 무주군 무풍면 흑석 全北)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무풍장(茂豊場) 등지에서 의병장 이장춘(李長春)등 300여명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5월16일 무풍장 북방 천오백미터 흑석(黑石)에서 마중길 의병진 30여명은 일본군 수비대와 조우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대장 이장춘, 포장(砲將)정원준(鄭元俊), 교련관 마중길(馬中吉), 후군장 권병이(權秉貳) 중군장 신모(愼某)외 11명이 전사하고 1명이 포로가 됐다.

▲안내성(安乃成~1909 1 16·전북 재동 계수역)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전북 남원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결사항전 했다.  그러던 중 안내성은 1909년 1월16일 의병 30여명과 함께 계수역(契樹驛) 북방 약 20리 부근인 재동(在洞)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동지 5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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