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체절명(絶體絶命)의 국가적 위기에서 나라위해 몸바친 호국열사 논개

[머리말] 우리나라는 유사 이래 수많은 외침을 당하는 불행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모진 국난의 소용돌이가 굽이 칠 때마다 민족의 수호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연(憤然)히 일어나 목숨을 바쳐 싸운 많은 애국선열들과 우국지사들이 있었기에 오늘 이처럼 어엿한 독립 국가를 지켜올 수 있었든 것이다.

▲ 주논개 영정 (반신) 사진촬영/조경륜 기자
▲ 주논개 영정 (반신) 사진촬영/조경륜 기자

그러나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진주 남강 촉석루(矗石樓) 아래에서 처참한 패전의 비통함에 나라와 전우 그리고 남편의 원한을 분노에 찬 가슴에 비수(匕首)처럼 품고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를 죽음으로 수장시킨 충절의 여인 논개(論介)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왜곡(歪曲)된 사실로 묻혀 있었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몇몇 뜻 있는 선비들이 그녀의 숭고한 충절의 정신이 어둠 속에 묻혀 감을 애석히 여겨 단편적이나마 기록과 비문으로 남겨 놓아 오늘의 증표(證票)가 되고 있으며, 여기에 그 문헌들을 더듬어 논개의 생애를 개략해 보고 그녀의 충의열절의 정신을 밝혀 그 동안 그녀에 대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 민족정기를 되살려 우리의 나아갈 바 조국의 올바른 미래를 다짐해 보고자 한다.

▲ 주논개 영정이 모셔저 있는 논개사장
▲ 주논개 영정이 모셔저 있는 논개사장

[최경회(崔慶會)의 부실(副室)] 논개(論介)는 1574년(선조7년) 음 9월 3일 전북 장수군 임현내면 풍촌(현 장계면 대곡리 주촌(朱村)에서 서당 훈장인 아버지 주달문(朱達文)과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 朴氏) 사이에서 신안 주씨(新安 朱氏) 희(喜)의 20세손(世孫)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갑술년(甲戌年) 갑술월(甲戌月) 갑술일(甲戌日) 갑술시(甲戌時) 즉 사갑술(四甲戌)에 태어나 “개를 낳다”라는 경상도 사투리인 “개를 놓다”라는 말에서 “논개(論介)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불행하게도 3세에 하늘같은 부친을 병마에 잃고 주정뱅이 숙부 주달무(朱達武)에 얹혀살게 되었다. 그녀가 5세 되는 해에 어머니 박씨는 숙부가 한 동네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어린 논개를 팔아버린 것을 알고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논개 모녀는 김풍헌(金風憲)에 의하여 사기혼인으로 고발되어 당시 장수 현감 최경회(崔慶會)에 의하여 잡혀가게 되었다. 이윽고 무죄판결로 방면되었으나 갈 곳이 없었다. 마침 현감 최경회의 김씨(金氏) 부인이 병마에 시달려 항상 약을 먹는 처지여서 모녀는 현감 내외와 함께 관아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논개는 약 수발에 지성했으며 박씨 부인은 밥 수발에 지극해서 최경회 현감 내외의 맘에 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에도 현감이 부임하는 곳마다 동행하며 식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논개가 17세 되는 해에 최경회의 김씨 부인이 지병의 악화로 세상을 뜨자 崔慶會의 부실이 되었고. 이어 최경회가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버리고 모친 시묘(侍墓)를 위해 고향 화순으로 가면서 논개는 장수에 남게 되었다.

▲ 주논개 영정이 모셔저 있는 의암사
▲ 주논개 영정이 모셔저 있는 의암사

[논개의 살신성충(殺身成忠)] 矗石樓中 三壯士 (촉석루의 삼장사) 一杯笑指 長江水 (한잔 술로 웃음 지며 남강 물을 가리킨다.) 長江之水 流滔滔 (장강수의 맑은 물은 도도히 흐르나니) 波不渴兮 魂不死 (강물이 다 하여도 넋은 죽지 않으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왜군에 대한 의분을 참지 못해 시묘(侍墓)를 중지하고 의병을 일으켜 장수지방으로 오게 되었다. 최경회를 다시 만난 논개는 최경회가 왜병과 싸움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리는데 지극한 내조로 큰 역할을 했다.

이듬해 그녀는 최경회가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의 임무를 부여 받고 진주로 부임하자 뒤이어 진주성으로 갔다. 진주성으로 가는 도중에 일본군에게 붙잡혔으나 충청병마절도사 황진 장군의 도움으로 무사히 진주성에 도착 할 수 있었다.

▲ 주논개 영정이 모셔저 있는 논개사당에서 바라다 본 전경
▲ 주논개 영정이 모셔저 있는 논개사당에서 바라다 본 전경

일본은 1593년 계사년(선조26년) 게아무라 로코스케(毛谷村六助)에게 조선에 남아 있는 10만 병력을 맡겨 마지막 경남 서부지역과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삼키려 진주성 2차 보복침공을 감행했다. 6월의 장마철에 일본군의 21일부터 29일까지의 10여 일 간의 공격에 6만의 우리 병사와 백성은 필사의 혈투를 벌렸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성은 함락되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고종후(高從厚) 장군 등 살아남은 장수들도 위의 임종시(臨終詩)를 남기고 남강 물에 투신 자결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이에 일본은 7월 7석날 승전잔치를 한다며 기녀(妓女)를 모집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간신이 살아남은 논개는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국가와 남편의 원수를 갚기로 맹세하고 왜군의 승전연(勝戰宴)에 관기로 가장하여 참석한 후 남강 촉석루 아래 강가 위암((危巖)(의암(義巖))에서 교태로 게아무라 로코스케를 유인 수장시키는 거사를 단행했다. 당시 왜군은 승전잔치를 하면서도 언제 우리 의병이 기습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밤낮 삼엄한 경계를 취하고 있었다. 논개는 원수를 갚으려면 승전연에 참가해야 한다며 기녀로 가장하는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그녀의 죽음은 첫째 승승장구 달려오는 왜군의 기세를 꺾어 호남지방으로 진격하는 일본의 전략을 후퇴시킴으로써 호남지방이 무사했고 둘째는 당시 의기소침한 충청 전라 경상지역의 선비들로 하여금 의병에 참여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우게 됨으로써 그 후 병신년(丙申年;1596년)까지 소강상태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논개의 죽음은 임진왜란의 전사(戰史)에서 귀중한 한 획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 주논개 영정 (전신)
▲ 주논개 영정 (전신)

[신분적(身分的) 수모(受侮)] 당시 관료들은 <성리학적(性理學的)> 지배이념에 뿌리박힌 남존여비사상(男尊女卑思想)에 얽매여 기녀로 가장하여 순국한 한 부여자의 죽음 따위는 안중(眼中)에도 없었으며 사회적 인식 역시 단순한 여성이라는 신분에, 더욱이 기녀로 각인(刻印)된 채 긍정하기보다는 부정적으로, 추앙보다는 천시와 멸시로 일관해 버렸다.

그 후 왕마다 그녀의 죽음을 하나의 천한 기녀로, 그리고 후사(後嗣)도 없는 여인으로 치부해 버린 채, 1621년(광해군13년)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처음 기록됨을 비롯하여 1651년(효종 2년) 오두인(吳斗寅)의 <의암기(義巖記,> 최진한(崔鎭漢)의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에 이어 1740년(영조16년) 남덕하(南德夏)의 ,의기사(義妓祠) 건립으로 논개의 충의열절(忠義㤠節)의 정신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녀가 순국한 후 6대왕(六代王) 147년이 지나서였다. 이런 사실은 바로 논개가 기녀로 오인된 주요한 원인이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역사가 그녀를 기녀로 몰아세워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논개가 받은 첫 번째 수모였다. 더욱이 논개가 순국한지 350년 후인 1940년 경 한일합방으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이 주촌(朱村)에 들어와 논개의 비(碑)를 파괴하고 신안 주씨 일족을 지리산에서 모조리 잔인하게 내쫓는 등 350여 년 전의 논개의 충의열절의 흔적마저 없애버림으로써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것이 바로 논개의 두 번째의 수모였다.

그 후 1945년 해방을 맞은 우리 정부는 졸속한 국사 교과서의 편찬으로 논개의 인식이 거듭 기녀로 왜곡되는 세 번째의 누를 범(犯)함으로써 아직도 기녀라는 질곡(桎梏)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논개는 1521년 유몽인(柳夢寅)의 <어유야담(於于野談)>의 관기(官妓)로 기록됨을 효시(嚆矢)로 최진한(崔鎭漢)의 <의암사적비>에 이어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과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에서는 의기(義妓)로, 해주최씨대동보(海州崔氏大同譜)에서는 부실(副室)로 그리고 오늘날 충의열절(忠義㤠節)로 인정받기까지 실로 많은 세월의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녀는 불행하게도 3세에 하늘같은 부친을 병마에 잃고 주정뱅이 숙부 주달무(朱達武)에 얹혀살게 되었다. 그녀가 5세 되는 해에 어머니 박씨는 숙부가 한 동네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어린 논개를 팔아버린 것을 알고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논개 모녀는 김풍헌(金風憲)에 의하여 사기혼인으로 고발되어 당시 장수 현감 최경회(崔慶會)에 의하여 잡혀가게 되었다. 이윽고 무죄판결로 방면되었으나 갈 곳이 없었다. 마침 현감 최경회의 김씨(金氏) 부인이 병마에 시달려 항상 약을 먹는 처지여서 모녀는 현감 내외와 함께 관아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논개는 약 수발에 지성했으며 박씨 부인은 밥 수발에 지극해서 최경회 현감 내외의 맘에 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에도 현감이 부임하는 곳마다 동행하며 식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논개가 17세 되는 해에 최경회의 김씨 부인이 지병의 악화로 세상을 뜨자 崔慶會의 부실이 되었고. 이어 최경회가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버리고 모친 시묘(侍墓)를 위해 고향 화순으로 가면서 논개는 장수에 남게 되었다.

[논개의 살신성충(殺身成忠)] 矗石樓中 三壯士 (촉석루의 삼장사) 一杯笑指 長江水 (한잔 술로 웃음 지며 남강 물을 가리킨다.) 長江之水 流滔滔 (장강수의 맑은 물은 도도히 흐르나니) 波不渴兮 魂不死 (강물이 다 하여도 넋은 죽지 않으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왜군에 대한 의분을 참지 못해 시묘(侍墓)를 중지하고 의병을 일으켜 장수지방으로 오게 되었다. 최경회를 다시 만난 논개는 최경회가 왜병과 싸움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리는데 지극한 내조로 큰 역할을 했다.

이듬해 그녀는 최경회가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의 임무를 부여 받고 진주로 부임하자 뒤이어 진주성으로 갔다. 진주성으로 가는 도중에 일본군에게 붙잡혔으나 충청병마절도사 황진 장군의 도움으로 무사히 진주성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일본은 1593년 계사년(선조26년) 게아무라 로코스케(毛谷村六助)에게 조선에 남아 있는 10만 병력을 맡겨 마지막 경남 서부지역과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삼키려 진주성 2차 보복침공을 감행했다. 6월의 장마철에 일본군의 21일부터 29일까지의 10여 일 간의 공격에 6만의 우리 병사와 백성은 필사의 혈투를 벌렸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성은 함락되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고종후(高從厚) 장군 등 살아남은 장수들도 위의 임종시(臨終詩)를 남기고 남강 물에 투신 자결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이에 일본은 7월 7석날 승전잔치를 한다며 기녀(妓女)를 모집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간신이 살아남은 논개는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국가와 남편의 원수를 갚기로 맹세하고 왜군의 승전연(勝戰宴)에 관기로 가장하여 참석한 후 남강 촉석루 아래 강가 위암((危巖)(의암(義巖))에서 교태로 게아무라 로코스케를 유인 수장시키는 거사를 단행했다. 당시 왜군은 승전잔치를 하면서도 언제 우리 의병이 기습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밤낮 삼엄한 경계를 취하고 있었다. 논개는 원수를 갚으려면 승전연에 참가해야 한다며 기녀로 가장하는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그녀의 죽음은 첫째 승승장구 달려오는 왜군의 기세를 꺾어 호남지방으로 진격하는 일본의 전략을 후퇴시킴으로써 호남지방이 무사했고 둘째는 당시 의기소침한 충청 전라 경상지역의 선비들로 하여금 의병에 참여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우게 됨으로써 그 후 병신년(丙申年;1596년)까지 소강상태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논개의 죽음은 임진왜란의 전사(戰史)에서 귀중한 한 획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신분적(身分的) 수모(受侮)] 당시 관료들은 <성리학적(性理學的)> 지배이념에 뿌리박힌 남존여비사상(男尊女卑思想)에 얽매여 기녀로 가장하여 순국한 한 부여자의 죽음 따위는 안중(眼中)에도 없었으며 사회적 인식 역시 단순한 여성이라는 신분에, 더욱이 기녀로 각인(刻印)된 채 긍정하기보다는 부정적으로, 추앙보다는 천시와 멸시로 일관해 버렸다.

그 후 왕마다 그녀의 죽음을 하나의 천한 기녀로, 그리고 후사(後嗣)도 없는 여인으로 치부해 버린 채, 1621년(광해군13년)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처음 기록됨을 비롯하여 1651년(효종 2년) 오두인(吳斗寅)의 <의암기(義巖記,> 최진한(崔鎭漢)의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에 이어 1740년(영조16년) 남덕하(南德夏)의 ,의기사(義妓祠) 건립으로 논개의 충의열절(忠義㤠節)의 정신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녀가 순국한 후 6대왕(六代王) 147년이 지나서였다. 이런 사실은 바로 논개가 기녀로 오인된 주요한 원인이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역사가 그녀를 기녀로 몰아세워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논개가 받은 첫 번째 수모였다. 더욱이 논개가 순국한지 350년 후인 1940년 경 한일합방으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이 주촌(朱村)에 들어와 논개의 비(碑)를 파괴하고 신안 주씨 일족을 지리산에서 모조리 잔인하게 내쫓는 등 350여 년 전의 논개의 충의열절의 흔적마저 없애버림으로써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것이 바로 논개의 두 번째의 수모였다.

그 후 1945년 해방을 맞은 우리 정부는 졸속한 국사 교과서의 편찬으로 논개의 인식이 거듭 기녀로 왜곡되는 세 번째의 누를 범(犯)함으로써 아직도 기녀라는 질곡(桎梏)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논개는 1521년 유몽인(柳夢寅)의 <어유야담(於于野談)>의 관기(官妓)로 기록됨을 효시(嚆矢)로 최진한(崔鎭漢)의 <의암사적비>에 이어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과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에서는 의기(義妓)로, 해주최씨대동보(海州崔氏大同譜)에서는 부실(副室)로 그리고 오늘날 충의열절(忠義㤠節)로 인정받기까지 실로 많은 세월의 수난을 겪어야 했다.

충의열절(忠義㤠節)을 도덕적 가치로 중시하는 유교적 봉건사회에서 논개의충의열절의 정신을 부정하고 멸시한 것은 바로 나라의 근간인 민족혼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일이었다. 더구나 나라 잃는 민족의 수난을 당하는 치욕의 역사를 벗어난 지 70여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지 못하고 왜곡된 사실을 버려두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논개가 진주에 있었던 기간은 1593년 5월 15일 경에서 같은 해 7월 7일까지였으니 불과 50여 일이었다. 그것도 진주성 안에서 진주성주의 아내로써 언제 왜군이 침공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밤낮 전쟁준비를 하다가 결국 치열한 전투 그리고 순절하는 절박한 나날이었다.

진정 혈혈단신으로 수백리길 사고무친 피비린내 나는 사면초가의 적진 속에서 적장을 유인하여 육탄으로 수장 시킨 논개의 살신성충의 결연(決然)한 순국의거(殉國義擧)는 오직 기생으로 가장하였기에 감히 할 수 있었던 일이다. 당시 기녀가 아니면 승전연(勝戰宴)에 참석할 수 없었고 승전연이 아니면 왜장에게 접근하여 원수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논개는 간파(看破)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논개의 비범한 지혜였다. 논개는 수무살의 어린 연약한 몸으로 죽음을 무름 쓰고 엄청난 거사를 의연(毅然)하게 홀로 결행했다. 진정 논개는 거룩한 죽음을 선택할 줄 알았고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을 버릴 줄 알았던 참된 의인이었다.

그녀가 순국한지 400여년! 그 동안 유교이념에 눈이 멀고 ,일제의 침략으로 입이 묶여 논개의 진정한 죽음이 왜곡된 채 빛을 보지 못했다. 이제 논개는 기녀가 아닌 양가집 부인으로 거듭나야 하고 그녀의 충의열절의 정신은 역사적 사실로 정사에 수록되어 청사에 기리 빛날 충의열절의 표상으로 후세에 바르게 전수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논개의 순국의거의 정신은 국민에게 민족혼을 일깨우고 청소년들에게 충의열절의 정신을 길러주는 생생한 교육의 귀감(龜鑑)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논개사당(論介祠堂) 의암사(義巖祠) 논개사당 해설사 김기곤 論介祠堂 解說士 金基坤

한편, 전라북조 장수군은 1955년(乙未)에 장수군민들은 만시지탄(晩時之歎)하며 이 고장에서 태어난 논개의 살신성충(殺身成忠)의 정신을 기리고자 합심하여 영정각(影幀閣)을 세워 논개의 영정(影幀)을 모셔놓고 매년 논개의 탄신일인 음력 9월 초 3일에 제향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후 국가는 이러한 장수군민의 애국충정을 받들어 내외삼문 기념관 등을 건립하고 수명비각(竪名碑閣)을 옮기고 1981년에 <의암사(義巖祠)>라 이름하여 지방기념물 46호로 지정 문화재로 관리 보호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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